For 100 days in 1994, the African country of Rwanda suffered a horrific campaign of mass murder. Neighbor turned against neighbor as violence engulfed the region, resulting in the deaths of over one-tenth of the country’s population.
1994년 아프리카 국가인 르완다는 100일에 걸쳐 끔찍한 대량 학살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폭력이 그 지역을 덮쳐오면서 이웃들마저 서로 적이 되어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결국 사망하였습니다.
The seeds of this conflict were planted a century earlier, first when German, and later Belgian, colonizers arrived in the country. At the time, Rwanda was ruled by a monarchy of Tutsi, one of the three ethnic groups comprising the population. Tutsi and the even smaller Twa communities were minority groups, while Hutu composed the majority. Many Hutus and Tutsi civilians were on good terms, but colonial powers encouraged political division. Belgians enforced record keeping around ethnic identity, and created a public narrative that cast Tutsi as elite rulers and Hutu as ordinary farmers. Over time, this propaganda led to intense political hostility. And while colonial powers had largely withdrawn by 1959, lingering anger motivated a Hutu revolt, forcing many Tutsi leaders to flee the country.
이런 대립의 씨는 한 세기 전에 뿌려졌는데 처음에는 독일, 다음에는 벨기에 식민주의자들이 도착한 것입니다. 당시에 르완다는 투치족 왕국이 통치했는데 투치족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세 부족들 중 하나였습니다. 투치족보다 더 적은 트와족과 투치족은 소수였고, 후투족이 다수였습니다. 후투족과 투치족 대부분은 사이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식민 세력들이 정치적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벨기에는 강압적으로 부족의 정체성을 조작했는데 공공연히 이야기를 꾸며내서 투치족은 유능한 통치자로 후투족은 평범한 농민으로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 선동은 극심한 정치적 대립을 낳았습니다. 1959년까지 식민 세력은 대체로 철수했지만, 여전한 분노가 후투족 폭동을 일으키고 수많은 투치족 지도자들이 나라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Over the following decade, Rwanda transitioned to an independent republic with a Hutu government. This new administration argued that as the majority group, Hutu deserved exclusive access to political power. They excluded the Tutsi minority by appointing offices based on population and prohibited the return of Tutsi families that had fled years earlier. Hutu extremists also circulated propaganda blaming Tutsi for the country’s economic, social, and political problems.
그 후로 십 년간 르완다는 후투족 정부가 이끄는 독립 국가로 나아갔습니다. 새 정부는 다수 집단인 후투족이 정권을 독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인구를 기준으로 관료를 뽑아서 소수 집단인 투치족을 배제하고 수년 전에 도망간 투치족들이 돌아오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또한,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경제, 사회, 정치적 문제가 투치족의 탓이라고 선동하였습니다.
Discontent with their life in exile, a small group of Tutsi insurgents invaded Rwanda in 1990, beginning a violent civil war. The conflict lasted three years before it was resolved with a formal peace accord. But the war’s aftermath was rife with insecurity. While some civilians in both groups remained amicable, the treaty intensified political polarization. And in 1994, when a plane carrying the Hutu Rwandan president was shot down, the conflict broke out anew.
망명지에서 사는 것에 불만을 품은 투치족의 소수 무장 세력이 1990년에 르완다로 진격했고 격렬한 내전이 막을 올렸습니다. 공식 평화 협정을 맺을 때까지 3년간 내전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혼란이 생겼습니다. 두 부족의 일부 시민들은 계속 우호적으로 지냈지만 협정으로 인해 정치적 대립은 심해졌습니다 1994년, 후투족인 르완다 대통령의 전용기가 격추되고 새롭게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This time, Hutu officials had prepared a deadly response to ensure they stayed in power. Working off a list of targets, government-funded Hutu militias flooded the streets, perpetrating acts of physical and sexual violence against Tutsi political enemies and civilians. Over the chaotic following months, over 1 million Hutu civilians joined their ranks due to coercion, self-preservation, or the pursuit of personal agendas.
이번에는 후투족 관리들이 권력을 유지하려고 악랄한 대응책을 세웠습니다. 목표물들을 제거하려는 정부가 자금을 대는 후투족 민병대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으며, 투치족 정적들과 시민들을 향해서 폭행과 성폭력을 일삼았습니다. 혼란스런 몇 달이 지나고, 백만 명이 넘는 후투족들이 강압에 의하거나 자기 보호, 또는 개인 소신에 따라 폭력에 가담했습니다.
Tutsi victims sought refuge at churches and schools where they hoped international organizations would protect them, but no outside party came to their aid. UN soldiers who’d overseen the Peace Accord were instructed to abandon Tutsi civilians, and UN leadership refused to acknowledge the genocide taking place. The violence didn’t end until mid-July, when the Tutsi army— who instigated the previous civil war— seized control of the country. By the time the fighting was over, roughly 800,000 Rwandans had been killed, and only a small fraction of the Tutsi population was left alive.
투치족 희생자들은 교회나 학교로 피해서 국제 기구들이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기대했지만 어느 곳도 도우러 오지 않았습니다. 평화 협정을 관장했던 유엔 군인들은 투치족 민간인들을 내버려두라는 지시를 받았고, 유엔 지도자들은 대량 학살을 부인했습니다. 폭력은 6월 중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전에 내전을 일으켰던 투치족 군인들이 국가의 통치권을 장악한 시점이죠. 내전이 끝날 때까지 르완다인 대략 80만 명이 학살을 당했으며, 투치족은 극히 일부만이 살아남았습니다.
In the months that followed, there was no easy strategy for bringing the killers to justice. The UN established a special tribunal in Tanzania to try the key perpetrators. But Hutu civilians from every level of society had committed atrocities against their neighbors, friends, and even family members. There were roughly 120,000 Rwandans awaiting trial, and inmates were dying from overcrowding and poor hygiene.
한 달이 지났어도, 살인자들을 심판할 방법이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엔은 탄자니아에 특별 법정을 세워 주요 범죄자들을 심판하려 했지만 모든 계층의 후투족이 이웃과, 친구들을 상대로, 심지어 가족들에게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르완다인 대략 12만 명이 재판을 기다리면서 과잉 수용과 비위생적 환경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The new Rwandan government estimated it would take 100 years to prosecute every accused civilian in national court. So officials determined the best path forward involved looking to the country’s past. Rwanda has a traditional process for resolving interpersonal conflicts called gacaca. Roughly translating to “justice on the grass,” gacaca had long been used to address offenses within villages. Local witnesses would offer testimony and could then speak for or against the accused. Then, appointed lay judges would determine an appropriate penalty within the community’s means.
르완다 신정부는 기소된 사람들을 모두 소환하는 데 100년이 걸릴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래서 정부 관료들은 나라의 과거를 고찰하는 것이 미래를 향한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르완다에는 대립을 해결하는 전통적인 과정이 있는데 이를 ‘가차차’라고 부릅니다. 대략 번역하면 ‘잔디 위의 정의’입니다. 가차차는 오랫동안 마을에서 범죄를 다루는 데 쓰였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증언을 신청할 수 있으며 피의자를 옹호할 수도 있고 유죄 증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 지정된 심판관들이 그 지역에 있는 수단으로 적당한 형벌을 결정하였습니다.
In the hope of trying perpetrators more quickly, the government adapted gacaca for their formal courts. These hybrid trials had no professional attorneys or judges, and no evidence outside the spoken word and a case file detailing the crimes of the accused. All charges were then divided into four categories: masterminding the genocide and committing acts of sexual violence, participating in the killings, physical assault, or destroying Tutsi property. Those found guilty of the first two categories were entered into the traditional court system, but the other crimes were assigned set penalties which could be reduced if the accused pled guilty.
수감자들의 판결을 더 신속하게 하려고 정부는 가차차를 정식 재판으로 채택하였습니다. 이 혼합 재판에는 전문 변호사나 판사가 없었고, 증언 이외에 다른 증거도 없었으며 피의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은 사건 서류조차 없었습니다. 죄목은 모두 네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대량 학살을 계획한 것, 성폭력을 자행한 것, 살인과 물리적 폭력에 가담한 것과 투치족 재산을 파손한 것입니다. 처음 두 가지 혐의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기존의 재판 방식을 거치지만 나머지는 정해진 형벌을 받았으며 혐의를 인정할 경우에는 형벌이 줄어들 수 있었습니다.
Beginning in 2002, thousands of gacaca courts convened every week. The process proved faster than conventional courts, but Rwandan opinion on the trials was mixed. Some didn’t want to accuse their neighbors in a community setting, and many potential witnesses were intimidated to prevent their testimony. Additionally, while the trial showed that not all Hutu participated in the killings, the courts only reviewed cases with Tutsi victims, ignoring the Hutu casualties incurred during the genocide and the preceding civil war.
2002년부터 가차차 재판이 매주 수천 건 열렸습니다. 기존 재판보다 더 신속하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재판을 바라보는 르완다인들의 의견은 복잡합니다. 같은 마을 주민으로서 일부 주민들은 이웃들을 고소하려 하지 않았고, 많은 잠정적 증인들이 증언을 할 수 없게 위협을 받았습니다. 또한, 후투족 모두가 살인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는 판결을 하면서, 재판은 투치족이 희생자인 경우만을 검토하였고 민족 학살과 이전의 내전에서 후투족이 입은 피해들은 무시하였습니다.
When the trials concluded in 2012, the courts had convicted 1.7 million individuals. For some families, these verdicts helped restore the dignity of those lost in the violence. For others, the trials were a decade-long reminder of a past they were desperate to leave behind.
재판이 종결된 2012년까지 재판에서는 백칠십만 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일부 가족들에게는 이러한 결정이 폭력으로 짓밟힌 가족의 위신을 회복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재판이 어떻게든 지워버리고 싶었던 과거를 십 년간 상기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