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 the five senses, vision is the one that I appreciate the most, and it's the one that I can least take for granted. I think this is partially due to my father, who was blind. It was a fact that he didn't make much of a fuss about, usually. One time in Nova Scotia, when we went to see a total eclipse of the sun --
다섯가지 감각 가운데,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시각입니다. 또한 가장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죠. 아마 앞을 못보시던 아버지 때문에 그런 면이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보통 그 사실에 대해서 그다지 호들갑을 떨지 않으셨죠. 언젠가 노바 스코샤에서 개기일식을 보러갔을 때...
(Laughter)
예, 칼리 사이먼의 노래에 나오는 그 일식입니다.
Yeah, same one as in the Carly Simon song, which may or may not refer to James Taylor, Warren Beatty or Mick Jagger; we're not really sure. They handed out these dark plastic viewers that allowed us to look directly at the sun without damaging our eyes. But Dad got really scared; he didn't want us doing that. He wanted us instead to use these cheap cardboard viewers, so that there was no chance at all that our eyes would be damaged. I thought this was a little strange at the time.
혹은 어쩌면 제임스 테일러, 워렌 비티, 믹 재거와도 관련 있을지 뭐 확실하진 않죠. 그곳에서는 어두운 플라스틱 안경을 나눠줬습니다. 직접 태양을 쳐다봐도 눈을 상하지 않게 해주는 물건이죠. 하지만 아버지는 정말 불안해했어요. 우리가 눈이 상하지 않았으면 하셨죠. 그 대신 싸구려 마분지 반사경을 쓰게 하셨습니다. 눈이 상할 가능성이 아예 없도록 말이죠. 당시에는 그것을 좀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What I didn't know at the time was that my father had actually been born with perfect eyesight. When he and his sister Martha were just very little, their mom took them out to see a total eclipse -- or actually, a solar eclipse -- and not long after that, both of them started losing their eyesight. Decades later, it turned out that the source of their blindness was most likely some sort of bacterial infection. As near as we can tell, it had nothing whatsoever to do with that solar eclipse, but by then my grandmother had already gone to her grave thinking it was her fault.
그 당시 몰랐던 것은, 아버지께서 태어나셨을 땐 시력이 멀쩡하셨다는 것이죠. 아버지와 마르타 고모가 어릴 적에, 할머니께서 개기일식 관측에 데려가셨는데 아니 사실 그냥 일식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여하튼 얼마 가지 않아서 두 분 모두 시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수십년 후, 시력상실의 원인이 일종의 세균 감염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혀졌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일식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이미 할머니께서는 그 모든 것을 스스로의 탓으로 생각하시며 돌아가신 후였죠.
So, Dad graduated Harvard in 1946, married my mom, and bought a house in Lexington, Massachusetts, where the first shots were fired against the British in 1775, although we didn't actually hit any of them until Concord. He got a job working for Raytheon designing guidance systems, which was part of the Route 128 high-tech axis in those days -- so, the equivalent of Silicon Valley in the '70s. Dad wasn't a real militaristic kind of guy; he just felt bad that he wasn't able to fight in World War II on account of his handicap, although they did let him get through the several-hour-long army physical exam before they got to the very last test, which was for vision.
자, 아버지는 1946년에 하버드를 졸업하셨습니다. 어머니와 결혼하시고 매사추세츠주 렉싱턴에 집을 사셨죠. 그곳은 1775년에 영국인들에게 처음 총을 발포했던 장소인데, 사실 콩코드시까지 밀려나기 전에는 한 발도 못맞췄죠. 레이시온사에 직장을 구하셨고, 그 곳에서 유도 시스템을 디자인하셨습니다. 그 당시 128번 도로 하이테크 단지의 일부였죠. 즉 70년대의 실리콘 밸리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다지 군대 쪽에 어울리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2차대전에 참전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셨을 뿐이죠. 장애 때문에 말입니다. 사실 군 당국자들은 아버지를 거의 통과시켜 줬습니다. 몇 시간에 걸친 신체검사를 하고 맨 마지막 검사에서야 걸렸죠. 그게 바로 시력검사였습니다.
(Laughter)
(웃음)
So Dad started racking up all of these patents and gaining a reputation as a blind genius, rocket scientist, inventor. But to us he was just Dad, and our home life was pretty normal. As a kid, I watched a lot of television and had lots of nerdy hobbies like mineralogy and microbiology and the space program and a little bit of politics. I played a lot of chess. But at the age of 14, a friend got me interested in comic books, and I decided that was what I wanted to do for a living.
여하튼 그래서 아버지는 각종 특허들을 쓸어모으고 앞을 못보는 천재, 로켓 과학자, 발명가로 명성을 쌓으셨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저 아버지였습니다. 가정 생활도 꽤 평범했죠. 어린 시절, 저는 텔레비전을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범생이스러운 취미가 많았죠. 광물학, 미생물학, 우주 개발 계획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아 그리고 약간의 정치학도. 체스를 많이 뒀습니다. 하지만 14세 당시 친구 하나가 저를 만화책에 입문시켜 줬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먹고살자고 결심했습니다.
So, here's my dad: he's a scientist, he's an engineer and he's a military contractor. So, he has four kids, right? One grows up to become a computer scientist, one grows up to join the Navy, one grows up to become an engineer ... And then there's me: the comic book artist.
자, 아버지 입장에서 잠깐 보죠. 과학자시며, 공학자시고, 군사 관련 일을 하십니다. 자, 4명의 자녀가 있죠? 한 명은 자라나서 컴퓨터과학자가 됩니다. 한 명은 해군에 입대합니다. 한 명은 공학자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Laughter)
만화가입니다.
Which, incidentally, makes me the opposite of Dean Kamen, because I'm a comic book artist, son of an inventor, and he's an inventor, son of a comic book artist.
(웃음) 우연히도 저는 딘 케이먼의 정반대인데 저는 발명가의 아들인 만화가고 그분은 만화가의 아들인 발명가죠. (웃음)
(Laughter)
예, 사실입니다.
Right? It's true.
(박수)
(Applause)
재미있는 점은, 아버지가 저를 무척 신뢰하셨다는 것이죠.
The funny thing is, Dad had a lot of faith in me. He had faith in my abilities as a cartoonist, even though he had no direct evidence that I was any good whatsoever; everything he saw was just a blur. Now, this gives a real meaning to the term "blind faith," which doesn't have the same negative connotation for me that it does for other people. Now, faith in things which cannot be seen, which cannot be proved, is not the sort of faith that I've ever really related to all that much. I tend to like science, where what we see and can ascertain are the foundation of what we know.
아버지는 만화가로서의 제 능력을 믿어주셨습니다. 제가 잘 하고 있는지 직접적인 근거를 하나도 알지 못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아버지가 보신 것은 그저 흐릿한 무언가였죠. "맹신"이라는 말에 진짜 의미가 부여된 셈입니다. 덕분에 제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만큼 부정적인 어감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자, 볼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믿음이란 제 성향과 그다지 잘 맞는 종류의 믿음은 아닙니다. 저는 과학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학에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 그리고 확언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아는 것의 근간이죠.
But there's a middle ground, too -- a middle ground tread by people like poor old Charles Babbage and his steam-driven computers that were never built. Nobody really understood what it was that he had in mind except for Ada Lovelace, and he went to his grave trying to pursue that dream. Vannevar Bush with his memex -- this idea of all of human knowledge at your fingertips -- he had this vision. And I think a lot of people in his day probably thought he was a bit of a kook. And, yeah, we can look back in retrospect and say, "Yeah, ha-ha, it's all microfilm --
하지만 중간지대도 있기 마련입니다. 찰스 배비지 같은 불쌍한 분들이 들어섰던 중간지대죠. 결코 만들어지지 못한 그의 증기 컴퓨터 같은 것의 영역 말입니다. 그 누구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에이다 러브레이스만 빼고요. 그는 무덤에 누울 때까지 계속 그 꿈을 쫓아다녔죠. 바네바 부쉬와 그의 '메멕스' 개념도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지식을 손가락 끝에 가져온다는 발상 그런 비전이 있었죠. 그리고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가 좀 사기꾼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뭐, 회상을 하자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죠. "그래 하하, 뭐 다 마이크로 필름 이야기지". 하지만...
(Laughter)
요점은 그게 아닙니다. 미래의 모습을 이해했다는 것이죠.
But that's not the point; he understood the shape of the future. So did J.C.R. Licklider and his notions for computer-human interaction. Same thing: he understood the shape of the future, even though it was something that would only be implemented by people much later. Or Paul Baran, and his vision for packet switching. Hardly anybody listened to him in his day. Or even the people who actually pulled it off, the people at Bolt, Beranek and Newman in Boston, who just would sketch out these structures of what would eventually become a worldwide network, and sketching things on the back of napkins and on note papers and arguing over dinner at Howard Johnson's -- on Route 128 in Lexington, Massachusetts, just two miles from where I was studying the Queen's Gambit Deferred and listening to Gladys Knight & The Pips singing "Midnight Train to Georgia" --
릭라이더가 컴퓨터와 인간의 상호작용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마찬가지죠: 그는 미래의 형태를 이해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한참 후일에야 사람들이 써먹게 될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혹은 폴 배런이 가졌던 패킷 스위칭에 대한 비전은 어떨까요. 당시에는 거의 누구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혹은 정말로 그것을 실행한 사람들도 그렇죠. 보스턴의 BBN사 직원들 말입니다. 그 구조들을 스케치해내고 결국 그것이 나중에 전세계적 네트워크가 되었죠. 냅킨과 수첩 종이에 이것저것 스케치를 끄적이고 논쟁을 거듭한 곳은, 하워즈 존슨 식당의 저녁식사 자리 매사추세츠주 렉싱턴시 128번 도로 근처였습니다. 바로 2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저는 체스 수를 연구하고 있고 글래디스 나이트 & 핍스 음악을 들으며 "미드나이트 트레인 투 조지아"를 흥얼거리며 (웃음)
(Laughter)
아버지의 크고 푹신한 의자에서 뒹굴거렸죠.
in my dad's big easy chair, you know?
So, three types of vision, right? Vision based on what one cannot see, the vision of that unseen and unknowable. The vision of that which has already been proven or can be ascertained. And this third kind, a vision of something which can be, which may be, based on knowledge but is, as yet, unproven. Now, we've seen a lot of examples of people who are pursuing that sort of vision in science, but I think it's also true in the arts, it's true in politics, it's even true in personal endeavors.
자, 3가지 종류의 비전입니다. 우선 볼 수 없는 것에 기반한 비전 즉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또, 이미 증명되었거나 확언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 번째 비전, 즉 무언가 지식에 기반하고 있을 수도 있고, 기반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검증되지는 않은 것 말입니다. 지금껏 과학 분야에서 그런 종류의 비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여럿 봤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예술에서도, 정치에서도, 그리고 개인적 목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What it comes down to, really, is four basic principles: learn from everyone; follow no one; watch for patterns; and work like hell. I think these are the four principles that go into this. And it's that third one, especially, where visions of the future begin to manifest themselves. What's interesting is that this particular way of looking at the world, is, I think, only one of four different ways that manifest themselves in different fields of endeavor. In comics, I know that it results in sort of a formalist attitude towards trying to understand how it works. Then there's another, more classical attitude which embraces beauty and craft; another one which believes in the pure transparency of content; and then another, which emphasizes the authenticity of human experience and honesty and rawness.
이것은 실제로는 결국 4가지 기본 원칙으로 압축됩니다: 모두에게서 배워라, 아무도 따라가지 말라, 패턴을 관찰하라, 그리고 미친듯이 작업하라. 저는 이것이 여기 적용되는 4가지 원칙이라고 봅니다. 특히 세 번째 원칙에서 미래에 대한 비전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세계관의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여러가지 분야에서 나타나곤 하는 네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만화에서는 제가 알기로는 이런 방식은 일종의 형식주의 입장이 됩니다. 즉 무언가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하는 접근이죠. 반면 좀 더 고전적인 입장도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기술적 숙련을 중요시하죠. 또 다른 입장은, 순수하게 투명한 내용 전달을 신봉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인간 경험의 진정성, 정직성, 가공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These are four very different ways of looking at the world. I even gave them names: the classicist, the animist, the formalist and iconoclast. Interestingly, they seem to correspond more or less to Jung's four subdivisions of human thought. And they reflect a dichotomy of art and delight on left and the right; tradition and revolution on the top and the bottom. And if you go on the diagonal, you get content and form, and then beauty and truth. And it probably applies just as much to music and movies and fine art, which has nothing whatsoever to do with vision at all, or, for that matter, nothing to do with our conference theme of "Inspired by Nature," except to the extent of the fable of the frog who gives a ride to the scorpion on his back to get across the river because the scorpion promises not to sting him, but the scorpion stings him anyway and they both die, but not before the frog asks him why, and the scorpion says, "Because it's my nature." In that sense, yes.
이 네 가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매우 다른 방식입니다. 이름도 붙여봤습니다. 고전주의자, 영혼주의자, 형식주의자, 우상파괴자. 흥미롭게도, 이 구분은 다소나마 융의 인간 사고의 4가지 구분에 상응합니다. 그리고 각각 예술과 환희의 이분법을 좌와 우로 구분하고 전통과 혁신을 위와 아래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대각선으로 보면 내용과 형식의 구분이 있고 미학과 진실성의 추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런 것은 음악, 영화, 미술 등에 모두 적용될텐데 '비전'과 별로 상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번 강연의 주제인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다"와도 말이죠. 최소한... 뭐 그 개구리 우화 있잖습니까.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너는 이야기인데 전갈이 독침을 쏘지 않기로 약속해서 그렇게 했죠. 하지만 전갈은 여하튼 독침을 쏘고, 둘 다 죽습니다. 죽기 전에 개구리가 왜그랬냐고 물어보자 전갈이 말합니다. "그게 내 본성으로 자연스러우니까." 뭐 그런 의미라면, 상관이 있겠습니다. (웃음)
(Laughter)
그럼...
So this was my nature. The thing was, I saw that the route I took to discovering this focus in my work and who I was -- I saw it as just this road to discovery. Actually, it was just me embracing my nature, which means that I didn't actually fall that far from the tree, after all.
이것이 제게는 자연스럽습니다. 저는 제가 선택한 이 방식, 작업시에 초점을 맞추고 저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바로 이런 시각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실, 그냥 저 스스로 제 본성을 인정한 것이죠. 무슨 의미인가 하면, 사실 제가 가계도에서 저렇게 멀리 떨어져나오진 않았다는 겁니다.
So what does a "scientific mind" do in the arts? I started making comics, but I also started trying to understand them, almost immediately. One of the most important things about comics that I discovered was that comics are a visual medium, but they try to embrace all of the senses within it. So, the different elements of comics, like pictures and words, and the different symbols and everything in between that comics presents, are all funneled through the single conduit, a vision. So we have things like resemblance, where something which resembles the physical world can be abstracted in a couple of different directions: abstracted from resemblance, but still retaining the complete meaning, or abstracted away from both resemblance and meaning towards the picture plane.
그럼, 그런 "과학적 인간"이 예술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일까요? 뭐, 저는 만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거의 즉시, 만화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만화에 관해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만화가 시각적 매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감각을 시각으로 포용하려고 하죠. 그래서 만화의 서로 다른 요소들, 예를 들어 그림과 글, 다양한 심볼과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은 만화에서 선보일 때 시각이라는 단일한 경로를 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사성 같은 개념을 한번 보죠. 실제 세계와 유사한 무언가가 추상화될 수도 있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추상화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유사성으로부터 추상화되지만 여전히 의미는 온전하게 유지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유사성과 의미 모두 추상화되며 순수한 화상의 방향으로 가든지 말이죠. 이 세 가지를 합치면, 지도가 하나 만들어집니다.
Put all these three together, and you have a nice little map of the entire boundary of visual iconography, which comics can embrace. And if you move to the right you also get language, because that's abstracting even further from resemblance, but still maintaining meaning. Vision is called upon to represent sound and to understand the common properties of those two and their common heritage as well; also, to try to represent the texture of sound to capture its essential character through visuals. There's also a balance between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in comics. Comics is a kind of call and response, in which the artist gives you something to see within the panels, and then gives you something to imagine between the panels.
바로 만화가 포괄할 수 있는 시각 표현 전체를 담은 지도입니다. 오른쪽으로 넘어가면 '언어'도 나옵니다. 이것은 유사성으로부터 한층 더 추상화되죠. 하지만 의미는 여전히 남습니다. 시각은 소리를 표상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을 이해하고 공통적으로 야기하는 효과를 위해 쓰이죠. 또한 소리의 질감을 표상하고 핵심적 요인들을 잡아내기 위해 시각이 동원되죠.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사이의 균형 또한 만화의 일부입니다. 만화는 일종의 요청과 응답의 구조입니다. 작가는 여러분에게 칸 안에서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칸 사이에서는 무언가를 상상하도록 해주죠.
Also, another sense which comics' vision represents, and that's time. Sequence is a very important aspect of comics. Comics presents a kind of temporal map. And this temporal map was something that energizes modern comics, but I was wondering if perhaps it also energizes other sorts of forms, and I found some in history. You can see this same principle operating in these ancient versions of the same idea. What's happening is, an art form is colliding with a given technology, whether it's paint on stone, like the Tomb of Menna the Scribe in ancient Egypt, or a bas-relief sculpture rising up a stone column, or a 200-foot-long embroidery, or painted deerskin and tree bark running across 88 accordion-folded pages.
또한 만화에서 시각이 나타내는 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순서'는 만화의 매우 중요한 측면입니다. 만화는 일종의 시간의 지도를 보여줍니다. 시간의 지도라는 이런 기능이 현대 만화의 원동력이죠. 하지만 저는 이런 것이 다른 형식에서도 원동력이 되어주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몇가지 사례를 발견했죠. 그리고 마찬가지의 원칙을 같은 발상을 실현한 고대의 버전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면, 예술의 형식이 특정한 기술과 충돌하는 것이죠. 고대 이집트의 서기관 무덤 같이 돌 위에 도료를 넣은 것이든, 돌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부조 조각이든, 아니면 200피트 길이의 자수 천이든, 혹은 사슴 가죽과 나무껍질 위에 그림을 그려서 접이식으로 진행하는 88페이지든 말입니다.
What's interesting is, once you hit "print" -- and this is from 1450, by the way -- all of the artifacts of modern comics start to present themselves: rectilinear panel arrangements, simple line drawings without tone, and a left-to-right reading sequence. And within 100 years, you already start to see word balloons and captions, and it's really just a hop, skip and a jump from here to here. So I wrote a book about this in '93, but as I was finishing the book, I had to do a little bit of typesetting, and I was tired of going to my local copy shop to do it, so I bought a computer. And it was just a little thing -- it wasn't good for much except text entry -- but my father had told me about Moore's law back in the '70s, and I knew what was coming. And so, I kept my eyes peeled to see if the sort of changes that happened when we went from pre-print comics to print comics would happen when we went beyond, to post-print comics.
재미있는 점은, 인쇄라는 기술과 만나자마자... 참 이것은 1450년의 작품입니다... 현대만화의 모든 전형적 특징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직선적 칸 배열, 농담을 입히지 않은 간략화된 선화,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순서 등입니다. 그리고 100년 이내에 말풍선과 주석이 보이기 시작하죠. 그 후 여기서 여기까지 오는 것은 단숨에 점프하듯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93년에 책을 썼습니다. 하지만 책을 마무리할 무렵 식자 작업을 좀 해야 했고 동네 인쇄점에 매번 왔다갔다하기가 지겨워져서 컴퓨터를 샀죠. 그냥 사소한 일이었죠. 문자 입력 말고는 딱히 많이 유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예전에 제게 "무어의 법칙"을 들려주셨습니다. 70년대에 이미 무어의 법칙을 들었기에, 저는 앞으로 무엇이 다가올지 알았죠. 그래서 예의주시했습니다. 이전에 일어났던 성질 변화가 반복될지 말이죠. 인쇄 이전의 만화에서 인쇄만화로 넘어올 때 같은 변화가 그 너머 인쇄 이후의 만화로 들어설 때 또다시 벌어질지 말입니다.
So, one of the first things proposed was that we could mix the visuals of comics with the sound, motion and interactivity of the CD-ROMs being made in those days. This was even before the Web. And one of the first things they did was, they tried to take the comics page as is and transplant it to monitors, which was a classic McLuhanesque mistake of appropriating the shape of the previous technology as the content of the new technology. And so, what they would do is have these comic pages that resemble print comics pages, and they would introduce all this sound and motion. The problem was that if you go with this basic idea that space equals time in comics, what happens is that when you introduce sound and motion, which are temporal phenomena that can only be represented through time, they break with that continuity of presentation.
가장 먼저 제안된 것들 중 하나는 만화의 시각요소를 소리, 동작, 상호작용 같은 당대 CD-ROM 타이틀에서 구사하던 요소들과 합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죠 심지어 '웹'이 탄생하기도 전의 일입니다. 가장 먼저 시도되곤 했던 것은 만화의 페이지를 그대로 가져다가 모니터에 이식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이것은 고전적인 맥루헌풍 실수죠. 이전 기술의 겉모습을 새 기술의 내용물로 전용하는 것 말입니다. 결국 만들어지는 것은 인쇄만화를 본뜬 만화 페이지를 놓고 그 안에 소리와 동작을 집어넣는 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방식을 취한다면 만화에서는 공간으로 시간을 나타낸다는 것이 기본적인 발상인데, 소리와 동작을 집어넣으면 이런 것들은 시간을 통해서만 재현될 수 있는 관계로 만화를 보여주는 방식의 연속성을 단절시킨다는 겁니다.
Interactivity was another thing. There were hypertext comics, but the thing about hypertext is that everything in hypertext is either here, not here, or connected to here; it's profoundly nonspatial. The distance from Abraham Lincoln to a Lincoln penny to Penny Marshall to the Marshall Plan to "Plan 9" to nine lives: it's all the same.
상호작용도 또다른 이슈였죠. 하이퍼텍스트 만화라는 것도 창안되었습니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의 특징이란 모든 것들이 여기 있거나 여기 없거나 연결되어 있거나 하다는 것이죠. 심오할 정도로 탈공간적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에서 링컨이 그려진 1페니까지, 페니 마샬에서 마샬 플랜까지, "9호 계획"에서 아홉 목숨까지의 거리, 이 모든 것이 똑같습니다.
(Laughter)
(웃음)
But in comics, every aspect of the work, every element of the work, has a spatial relationship to every other element at all times.
그리고... 하지만 만화에서는, 작품의 모든 측면과 요소들이 다른 요소들과 항상 공간적 관계를 맺습니다.
So the question was: Was there any way to preserve that spatial relationship while still taking advantage of all of the things that digital had to offer us? And I found my personal answer for this in those ancient comics that I was showing you. Each of them has a single unbroken reading line, whether it's going zigzag across the walls or spiraling up a column or just straight left to right, or even going in a backwards zigzag across those 88 accordion-folded pages, the same thing is happening; that is, that the basic idea that as you move through space you move through time, is being carried out without any compromise, but there were compromises when print hit. Adjacent spaces were no longer adjacent moments, so the basic idea of comics was being broken again and again and again and again.
즉 문제는 이것입니다: 공간적 관계를 보존하면서도 디지털 기술이 제공해주는 여러 장점들을 활용할 방법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내리는 해답은 제가 보여드린 고대의 만화에 이미 있습니다. 각각의 작품들은 하나의 끊김 없는 독서 흐름선을 타고 있죠. 벽 위에서 지그재그로 오가든지, 기둥을 나선으로 휘감으며 올라가든지, 아니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직선으로 흐르거나, 혹은 심지어 반대방향으로 접이식 88페이지 위에 지그재그로 가든 말이죠. 이것은 항상 동일한 현상을 담아냅니다. 공간 속을 움직일 때 시간 속을 움직인다는 기본적 발상이 아무런 타협 없이 이뤄져왔죠. 하지만 인쇄가 도입되면서 타협이 필요해졌습니다. 인접한 공간은 더 이상 인접한 순간이 아니게 되었죠. 그래서 만화의 기본 발상은 자꾸 분절되고 또 분절되고 다시 분절되고 분절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봤습니다. 뭐,
And I thought, OK, well, if that's true, is there any way, when we go beyond today's print, to somehow bring that back? Now, the monitor is just as limited as the page, technically, right? It's a different shape, but other than that, it's the same basic limitation. But that's only if you look at the monitor as a page, but not if you look at the monitor as a window.
그렇다면, 혹시 오늘날 인쇄의 한계를 넘어 그런 것들을 다시 들여올 방법이 있을까? 그런데 모니터라는 것은 곧이곧대로 보자면 페이지 만큼이나 제한되어 있죠. 그렇죠? 모양은 다르지만, 그 이외에는 마찬가지의 제한사항입니다. 하지만 모니터를 페이지로 볼 때나 그렇죠. 모니터를 창으로 보면 달라집니다.
And that's what I propose, that perhaps we could create these comics on an infinite canvas, along the X axis and the Y axis and staircases. We could do circular narratives that were literally circular. We could do a turn in a story that was literally a turn. Parallel narratives could be literally parallel. X, Y and also Z. So I had all these notions. This was back in the late '90s, and other people in my business thought I was pretty crazy, but a lot of people then went on and actually did it. I'm going to show you a couple now.
그래서 제안했죠: 우리가 만화를 무한한 캔버스 위에 그린다면? X축으로, Y축으로, 또 계단식으로 말입니다. 순환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정말로 순환적인 모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방향 전환을, 진짜 방향 전환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병렬 진행 내러티브를 정말로 병렬시킬 수도 있죠. X축, Y축, Z축으로까지 말입니다. 이런 점들을 구상했던 것이 90년대 말 쯤입니다. 업계의 다른 이들은 제가 꽤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후 실제로 그런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몇가지를 지금 보여드리죠.
This was an early collage comic by a fellow named Jasen Lex. And notice what's going on here. What I'm searching for is a durable mutation -- that's what all of us are searching for. As media head into this new era, we are looking for mutations that are durable, that have some sort of staying power. Now, we're taking this basic idea of presenting comics in a visual medium, and we're carrying it through all the way from beginning to end. That's that entire comic you just saw, up on the screen right now. But even though we're only experiencing it one piece at a time, that's just where the technology is right now. As the technology evolves, as you get full immersive displays and whatnot, this sort of thing will only grow; it will adapt. It will adapt to its environment; it's a durable mutation.
이것은 제이슨 렉스라는 친구의 초창기 꼴라쥬 만화입니다. 한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찾는 것은 지속성 있는 돌연변이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찾고자 하는 것이죠. 미디어가 이런 새 시대를 맞이하면 사람들은 어떤 돌연변이를 찾습니다. 그 중 지속성이 있어서, 결국 계속 남아있게 될 것들 말이죠. 이번에는, 만화를 시각 미디어로 보여준다는 발상을 가져와서 시작부터 끝까지 한번 주욱 따라갑니다. 방금 보신 것은 작품 전체로 현재 스크린에 올라와있죠. 한번에 한 조각씩 경험해볼 수 밖에 없는데 현재 기술력이 아직 그 정도이다 보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 장치 같은 것들이 도입되면 이런 종류의 것들은 더욱 성장할 겁니다. 바로, 적응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환경에 적응할 것입니다. 지속성 있는 변이죠.
Here's another one. This is by Drew Weing; this is called "'Pup' Ponders the Heat Death of the Universe." See what's going on here as we draw these stories on an infinite canvas is you're creating a more pure expression of what this medium is all about. We'll go by this a little quickly. You get the idea. I just want to get to the last panel.
여기 다른 작품도 있습니다. 드루 와잉의 작품이죠. 제목은 "팝, 우주의 열죽음을 명상하다" 입니다. 여기 진행되는 것들을 보십시오. 이런 이야기들을 무한캔버스 위에 그려내면서 더욱 순수한 표현을 만들어냅니다. 이 매체의 근본에 가까운 것을 말이죠. 약간 빨리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대략 이런 식이죠. 마지막 칸으로 가보겠습니다.
[Cat 1: Pup! Earth to Pup! Cat 2: Come play baseball with us!]
(웃음)
(Laughter)
자, 도착.
[Pup: Did either of you realize that eventually the universe will be nothing but a thin, cold gas spread across infinite, lonely space?]
(웃음) (웃음)
[Cat 1: Oh ... Cat 2: We'd better hurry, then!]
(Laughter)
Just one more. Talk about your infinite canvas. It's by a guy named Daniel Merlin Goodbrey, in Britain.
하나만 더 보죠. 무한 캔버스에 관해서 말입니다. 영국에 대니얼 멀린 굿브레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Why is this important? I think this is important because media -- all media -- provide us a window back into our world. Now, it could be that motion pictures and eventually, virtual reality, or something equivalent to it, some sort of immersive display, is going to provide us with our most efficient escape from the world that we're in. That's why most people turn to storytelling, to escape. But media provides us with a window back into the world we live in. And when media evolve so that the identity of the media becomes increasingly unique -- because what you're looking at is comics cubed, you're looking at comics that are more comics-like than they've ever been before -- when that happens, you provide people with multiple ways of reentering the world through different windows. And when you do that, it allows them to triangulate the world they live in and see its shape. That's why I think this is important. One of many reasons, but I've got to go now. Thank you for having me.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제 생각에는 매체라는 것이, 모든 매체라는 것들이 우리 세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창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가, 그리고 결국은 가상현실이나 그런 류의 것들, 어떤 식의 몰입형 디스플레이 장치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공할 수 있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야기에 매달리는 것이 결국 도피하기 위해서니까요. 하지만 매체는 창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창 말이죠. 매체가 진화할수록 매체의 정체성은 더욱 독특해집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보고 계신 것은, 칸 만화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만화다운 만화를 보고 계신 셈이죠.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창문을 통해서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삼각측량해볼 수 있게 되며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게 되죠. 바로 그래서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이유 중 하나지만, 이제 시간이 됐네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