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s a question I've been puzzling over and writing about for pretty much all of my adult life. Why do some large-scale crises jolt us awake and inspire us to change and evolve while others might jolt us a bit, but then it's back to sleep? Now, the kind of shocks I'm talking about are big -- a cataclysmic market crash, rising fascism, an industrial accident that poisons on a massive scale. Now, events like this can act like a collective alarm bell. Suddenly, we see a threat, we get organized. We discover strength and resolve that was previously unimaginable. It's as if we're no longer walking, but leaping. Except, our collective alarm seems to be busted. Faced with a crisis, we often fall apart, regress and that becomes a window for antidemocratic forces to push societies backwards, to become more unequal and more unstable.
제가 성인 시절의 대부분을 고민하고 또 글로 적어보았던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큰 위기는 우리를 깨우고 영감을 주어 변화하고 진화하도록 하는 반면 다른 것들은 어째서 그러지 못한 채 다시 잠들고 마는 것일까요? 제가 이야기하는 충격이란 슈퍼마켓 충돌사고나 파시즘의 대두 거대한 규모의 산업 재해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건들은 사람들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죠. 갑자기 닥친 위기에 맞서 우리는 체계적으로 맞섭니다. 이전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힘과 결단력이 우리에게 있었음을 발견하죠. 더 이상 걸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크게 도약하는 거죠. 하지만 이젠 우리 모두를 깨우던 알람이 꺼진 것 같습니다. 위기에 맞아 우리는 무너지고, 후퇴하고 이는 반민주주의 세력이 사회를 후퇴 시키고 더 불평등하고 불안한 사회를 만드는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Ten years ago, I wrote about this backwards process and I called it the "Shock Doctrine." So what determines which road we navigate through crisis? Whether we grow up fast and find those strengths or whether we get knocked back. And I'd say this is a pressing question these days. Because things are pretty shocking out there. Record-breaking storms, drowning cities, record-breaking fires threatening to devour them, thousands of migrants disappearing beneath the waves. And openly supremacist movements rising, in many of our countries there are torches in the streets. And now there's no shortage of people who are sounding the alarm. But as a society, I don't think we can honestly say that we're responding with anything like the urgency that these overlapping crises demand from us. And yet, we know from history that it is possible for crisis to catalyze a kind of evolutionary leap.
10년 전 저는 이 후퇴 현상에 관해 충격 이론(Shock Doctrine) 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어떤 방향으로 헤쳐나갈 것인가? 빠르게 성장해 힘을 얻을 지 아니면 뒤로 후퇴하고 마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요즘들어 꽤 무거운 질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죠 기록적인 태풍, 물에 잠긴 도시 우리를 집어삼킬 듯한 초대형 산불 수만 명의 이민자들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집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시위가 공공연하게 일어나며 인류의 역사 내내 수 많은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겐 경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한 사회로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위기에 걸맞는 경각심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위기가 혁명적인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And one of the most striking examples of this progressive power of crisis is the Great Crash of 1929. There was the shock of the sudden market collapse followed by all of the aftershocks, the millions who lost everything thrown onto breadlines. And this was taken by many as a message that the system itself was broken. And many people listened and they leapt into action. In the United States and elsewhere, governments began to weave a safety net so that the next time there was a crash there would be programs like social security to catch people. There were huge job-creating public investments in housing, electrification and transit. And there was a wave of aggressive regulation to reign in the banks.
위기가 가져오는 긍정적 힘을 잘 보여주는 충격적인 예의 하나로 1929년에 발생한 대공황을 들 수 있습니다. 시장이 갑작스럽게 붕괴했고 그 여파로 인해 수백 만의 사람들이 최저 수준의 생활로 내몰렸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를 경제 시스템 자체의 붕괴로 생각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문제에 주목하고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미국를 비롯한 여러 국가의 정부가 사회 안전망을 조직해서 다음에 비슷한 위기가 찾아와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회 안전 체계를 수립했습니다. 주택, 전기, 수송 산업에서 일자리 조성을 위한 정부의 대규모 투자가 있었습니다. 은행에 재갈을 물리는 대규모 규제 바람이 불었습니다
Now, these reforms were far from perfect. In the US, African American workers, immigrants and women were largely excluded. But the Depression period, along with the transformation of allied nations and economies during the World War II effort, show us that it is possible for complex societies to rapidly transform themselves in the face of a collective threat. Now, when we tell this story of the 1929 Crash, that's usually the formula that it follows -- that there was a shock and it induced a wake-up call and that produced a leap to a safer place.
오늘날 이런 개혁은 한참 기준에 못 미치죠. 흑인 노동자, 이민자, 여성은 대체로 제외됩니다. 대공황 시기와 2차 대전 당시 연합국이 실시했던 경제 개혁 등 여러 가지 노력은 고도화된 복잡한 사회라도 자신을 위협하는 위기에 맞서 급격한 변화를 이뤄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1929년 대공황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대공황 때도 전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는데요 사회를 흔든 충격이 사람들을 깨우고 더 안전한 사회로 도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Now, if that's really what it took, then why isn't it working anymore? Why do today's non-stop shocks -- why don't they spur us into action? Why don't they produce leaps? Especially when it comes to climate change.
그렇다면 그 당시 작동하던 원리가 지금은 어째서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날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건들은 어째서 우리를 행동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째서 새로운 도약이 이뤄지지 않는 걸까요? 특히 기후변화 문제가 그렇습니다
So I want to talk to you today about what I think is a much more complete recipe for deep transformation catalyzed by shocking events. And I'm going to focus on two key ingredients that usually get left out of the history books.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사회에 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제가 생각하는 완벽한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선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두 가지 핵심 요소에 주목하려고 하는데요.
One has to do with imagination, the other with organization. Because it's in the interplay between the two where revolutionary power lies. So let's start with imagination. The victories of the New Deal didn't happen just because suddenly everybody understood the brutalities of laissez-faire. This was a time, let's remember, of tremendous ideological ferment, when many different ideas about how to organize societies did battle with one another in the public square. A time when humanity dared to dream big about different kinds of futures, many of them organized along radically egalitarian lines. Now, not all of these ideas were good but this was an era of explosive imagining. This meant that the movements demanding change knew what they were against -- crushing poverty, widening inequality -- but just as important, they knew what they were for. They had their "no" and they had their "yes," too. They also had very different models of political organization than we do today.
한 가지는 상상력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조직과 관련이 있습니다. 혁명을 이끄는 힘은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힘을 합칠 때 비로소 발생하거든요. 먼저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뉴딜 정책의 성공은 단순히 모두가 자유방임의 잔혹성을 어느날 갑자기 깨달아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당시는 대중들 사이에 어떤 사회를 이룩할 것인가를 놓고 수 많은 사상들이 싸우던 사상적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인류가 서로 다른 종류의 원대한 꿈에 감히 도전하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급진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위해 뭉치던 때였죠. 이 당시 나온 사상들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상상력이 흘러 넘쳐 폭발하던 시기였어요. 변화를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가난을 없애고 늘어나는 불평등을 없애려고 했죠. 또한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지 잘 알고 있었어요. 언제 "아니오"를 말하고 "예"를 말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죠. 또한 지금과는 상이하게 다른 정치 조직들이 존재하던 때였습니다.
For decades, social and labor movements had been building up their membership bases, linking their causes together and increasing their strength. Which meant that by the time the Crash happened, there was already a movement that was large and broad enough to, for instance, stage strikes that didn't just shut down factories, but shut down entire cities. The big policy wins of the New Deal were actually offered as compromises. Because the alternative seemed to be revolution.
수십 년동안 사회 및 노동운동은 같은 목적 의식 아래 뭉쳐서 자신들의 세를 불려왔습니다. 이는 대공황이 발생했을 당시 공장 몇 개 정도가 아니라 도시 전체를 마비시킬 수있을 정도로 강력한 노동운동이 벌어지던 시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뉴딜 정책의 성공은 타협의 결과물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혁명이 일어났을 테니까요.
So, let's adjust that equation from earlier. A shocking event plus utopian imagination plus movement muscle, that's how we get a real leap.
그럼 공식을 다시 한번 정의해봅시다. 충격적인 사건과 유토피아적 상상력 거기에 사회 운동을 추진할 힘이 붙을 때 다음 단계로 실제 도약을 할 수 있습니다.
So how does our present moment measure up? We are living, once again, at a time of extraordinary political engagements. Politics is a mass obsession. Progressive movements are growing and resisting with tremendous courage. And yet, we know from history that "no" is not enough. Now, there are some "yeses" out there that are emerging. And they're actually getting a lot bolder quickly. Where climate activists used to talk about changing light bulbs, now we're pushing for 100 percent of our energy to come from the sun, wind and waves, and to do it fast. Movements catalyzed by police violence against black bodies are calling for an end to militarized police, mass incarceration and even for reparations for slavery. Students are not just opposing tuition increases, but from Chile to Canada to the UK, they are calling for free tuition and debt cancellation. And yet, this still doesn't add up to the kind of holistic and universalist vision of a different world than our predecessors had. So why is that?
자 그럼 우리의 현재 상황을 살펴볼까요? 우리는 다시 한 번 정치적 참여가 매우 활발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정치는 곧 집단적 강박관념과 같습니다. 진보 운동은 커다란 용기가 있을 때에만 견디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아직 "아니오"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를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순식간에 대담해지고 있어요. 기후 변화 운동가들이 전구를 다른 무언가로 대체할 것을 이야기했는데 이제 우리는 태양과 바람, 수력을 이용해서 에너지를 100% 수급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말이죠. 흑인을 향한 경찰의 폭력에 반대하는 운동은 무장 경찰과 집단 투옥 심지어는 노예제의 폐지까지 이끌어냈습니다. 학생들은 단순히 교육비의 인상에 반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칠레에서 캐나다 영국에 이르기까지 교육 무상화와 빚의 변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앞선 세대들이 꿈꿨던 전체론적이고 전 세계를 아우르는 새로운 세계의 탄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Well, very often we think about political change in defined compartments these days. Environment in one box, inequality in another, racial and gender justice in a couple of other boxes, education over here, health over there. And within each compartment, there are thousands upon thousands of different groups and NGOs, each competing with one another for credit, name recognition and of course, resources. In other words, we act a lot like corporate brands. Now, this is often referred to as the problem of silos. Now, silos are understandable. They carve up our complex world into manageable chunks. They help us feel less overwhelmed. But in the process, they also train our brains to tune out when somebody else's issue comes up and when somebody else's issue needs our help and support. And they also keep us from seeing glaring connections between our issues.
오늘날 정치적 변화를 이야기할 때 각 사안을 따로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환경 문제 불평등 문제는 다른 상자에 인종이나 젠더 문제는 또 각각 다른 상자에 교육은 여기, 건강은 여기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각 사안에는 수십 수만 개의 다양한 단체와 NGO가 명성, 사회적 인식, 경제 후원등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기업들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죠. 이는 흔히 사일로 문제(the problem of silos)라고 하는데 물론 이런 방식이 이해는 갑니다. 복잡하게 얽힌 우리 세계를 좀 더 다루기 쉬운 덩어리로 나눌 수 있죠. 덕분에 우리는 문제들을 다루기 용이해집니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우리 뇌는 타인이 어려움에 처할 때 이들에게 우리의 도움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지나가도록 우리 뇌를 훈련시키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각 문제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보지 못하게 되죠.
So for instance, the people fighting poverty and inequality rarely talk about climate change. Even though we see time and again that it's the poorest of people who are the most vulnerable to extreme weather. The climate change people rarely talk about war and occupation. Even though we know that the thirst for fossil fuels has been a major driver of conflict. The environmental movement has gotten better at pointing out that the nations that are getting hit hardest by climate change are populated overwhelmingly by black and brown people. But when black lives are treated as disposable in prisons, in schools and on the streets, these connections are too rarely made.
가난과 불평등 문제로 싸우는 이들은 기후 변화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이 기후에 가장 취약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기후 변화를 걱정하는 이들은 전쟁이나 일자리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습니다. 화석 연료를 차지하려는 욕심이 분쟁을 일으키는 주요원인임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죠. 환경운동주의자들은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데 더 능숙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국들은 대부분 검거나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죠. 하지만 감옥이나 학교, 길거리에서 흑인들이 얼마나 차별받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이 두 가지 문제 사이의 연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The walls between our silos also means that our solutions, when they emerge, are also disconnected from each other. So progressives now have this long list of demands that I was mentioning earlier, those "yeses." But what we're still missing is that coherent picture of the world we're fighting for. What it looks like, what it feels like, and most of all, what its core values are. And that really matters. Because when large-scale crises hit us and we are confronted with the need to leap somewhere safer, there isn't any agreement on what that place is. And leaping without a destination looks a lot like jumping up and down.
각 사안들을 가르고 있는 벽은 곧 우리가 그 해결책을 제시할 때 서로 분리된 채 유기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개혁운동은 이제부터 제가 앞서 말한 수많은 "예(yes)"를 모두 아우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맞서 싸우려는 세계의 종합적인 그림을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생겼고 어떤 느낌이고 무엇보다 핵심적인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요. 이게 정말 중요한 문제죠. 왜냐하면 커다란 위기가 우리를 덮칠 때 더 나은, 안전한 사회로의 이행이 필요한 때 그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하는가에 대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목적지 없이 그저 도약하기만 한다면 제자리에서 뛰는 일이 되겠죠.
(Laughter)
(웃음)
Fortunately, there are all kinds of conversations and experiments going on to try to overcome these divisions that are holding us back. And I want to finish by talking about one of them.
다행히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각 사안을 나누는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많은 대화와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서 강연을 마치려고 합니다.
A couple of years ago, a group of us in Canada decided that we were hitting the limits of what we could accomplish in our various silos. So we locked ourselves in a room for two days, and we tried to figure out what bound us together. In that room were people who rarely get face to face. There were indigenous elders with hipsters working on transit. There was the head of Greenpeace with a union leader representing oil workers and loggers. There were faith leaders and feminist icons and many more. And we gave ourselves a pretty ambitious assignment: agreeing on a short statement describing the world after we win. The world after we've already made the transition to a clean economy and a much fairer society. In other words, instead of trying to scare people about what will happen if we don't act, we decided to try to inspire them with what could happen if we did act.
캐나다에 있는 우리 모임의 일부가 우리가 갖고 있는 다양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한계를 넘어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방 안에 이틀동안 쳐박혀서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는지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냈습니다. 방 안은 서로 얼굴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죠. 토박이 노인들부터 옮겨다니며 일하는 힙스터들 그린피스의 수장 석유 산업 노동자와 벌목꾼의 노조 대표 또 페미니스트 운동의 자도자 등등 각종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우리는 아주 야심찬 계획을 세웠죠. 승리를 쟁취한 뒤 만들어 갈 사회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짧은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이미 부패 없는 경제와 훨씬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난 이후 등장할 사회에 대해서 말이죠. 달리 말하면 우리가 움직이지 않을 경우 초래될 결과로 사람들을 겁주는 대신 우리가 행동에 착수했을 때 이룰 수 있는 것을 상상해 영감을 주고 싶었어요
Sensible people are always telling us that change needs to come in small increments. That politics is the art of the possible and that we can't let the perfect be the enemy of the good. Well, we rejected all of that. We wrote a manifesto, and we called it "The Leap." I have to tell you that agreeing on our common "yes" across such diversity of experiences and against a backdrop of a lot of painful history was not easy work. But it was also pretty thrilling. Because as soon as we gave ourselves permission to dream, those threads connecting much of our work became self-evident.
양식있는 이들은 변화는 비둘기 걸음처럼 천천히 다가와야 한다고 늘상 이야기합니다. 정치란 가능성의 예술이고 완벽을 좇다가 좋은 것마저 놓쳐선 안된다고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모두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선언을 했고 그것을 "도약"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양한 경험을 했고 수 없이 많은 아픈 역사를 뒤로한 채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예"를 도출하는 것은 쉽지 않음을 고백해야겠네요. 하지만 동시에 가슴 떨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꿈을 꿔도 좋다고 마음먹는 순간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문제들을 이어주는 고리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죠.
We realized, for instance, that the bottomless quest for profits that is forcing so many people to work more than 50 hours a week, without security, and that is fueling this epidemic of despair is the same quest for bottomless profits and endless growth that is at the heart of our ecological crisis and is destabilizing our planet. It also became clear what we need to do. We need to create a culture of care-taking. In which no one and nowhere is thrown away. In which the inherent value of all people and every ecosystem is foundational. So we came up with this people's platform, and don't worry, I'm not going to read the whole thing to you out loud -- if you're interested, you can read it at theleap.org. But I will give you a taste of what we came up with.
예를 들면 끝없는 이윤 추구라는 목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주당 50시간 이상을 안전하지 않는 일터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또 끝없는 이윤 추구와 그칠 줄 모르는 성장에 대한 욕심이 절망이라는 전염병을 퍼뜨리고 있으며 지구를 위협하고 환경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도 분명해졌는데요. 바로 서로를 챙겨주는 문화를 만드는 일입니다. 누구도, 어느 지역도 버림받지 않는 문화 또 모든 사람이 갖는 내적 가치와 모든 생태계가 존중받는 문화요.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바람과 기대를 담은 사회를 구상해보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큰 소리로 전부 읽어드릴 테니까요. theleap.org를 방문하시면 직접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구상 을 대략적으로만 알려드릴게요.
So we call for that 100 percent renewable economy in a hurry, but we went further. Calls for new kinds of trade deals, a robust debate on a guaranteed annual income, full rights for immigrant workers, getting corporate money out of politics, free universal day care, electoral reform and more. What we discovered is that a great many of us are looking for permission to act less like brands and more like movements. Because movements don't care about credit. They want good ideas to spread far and wide. What I love about The Leap is that it rejects the idea that there is this hierarchy of crisis, and it doesn't ask anyone to prioritize one struggle over another or wait their turn. And though it was birthed in Canada, we've discovered that it travels well. Since we launched, The Leap has been picked up around the world with similar platforms, being written from Nunavut to Australia, to Norway to the UK and the US, where it's gaining a lot of traction in cities like Los Angeles, where it's being localized. And also in rural communities that are traditionally very conservative, but where politics is failing the vast majority of people.
우리는 천연 에너지만을 이용한 경제를 조속히 바라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에 그치지 않고 우리는 더 나아갔습니다. 새로운 무역 거래를 만들고 최소 연소득에 대한 활발한 토론 이주 노동자에 대한 완전한 권리 부여 정경유착의 금지 전국 어디서나 무료인 탁아소와, 선거 개혁 등등이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명예가 아닌 운동 그 자체를 위해 움직이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운동 그 자체에는 어떠한 개인적인 명예도 포함되지 않거든요. 이들은 좋은 생각을 널리 퍼뜨리고 공유하고 싶어해요. 제가 도약(The Leap)운동을 열렬히 지지하는 이유는 위기에도 경중이 있다는 생각에 반대하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순서대로 움직일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약운동은 캐나다에서 시작됐지만 전 세계로 퍼지고 있습니다. 도약운동이 시작된 이래 전 세계에서 비슷한 운동이 비슷한 형태로 누나부트(캐나다의 준주)에서 호주 노르웨이, 영국, 그리고 미국까지 퍼졌고 로스엔젤레스 같은 도시에서 많은 관심을 얻고 있으며 그 지역에 맞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아주 보수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외면받았던 대다수의 사람들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Here's what I've learned from studying shocks and disasters for two decades. Crises test us. We either fall apart or we grow up fast. Finding new reserves of strength and capacity that we never knew we had. The shocking events that fill us with dread today can transform us, and they can transform the world for the better. But first we need to picture the world that we're fighting for. And we have to dream it up together. Right now, every alarm in our house is going off simultaneously. It's time to listen. It's time to leap.
지난 20년 동안 일어난 사건 사고를 통해 배운 것이 있습니다. 위기를 우리를 시험하는 무대입니다. 위기를 맞고 쓰러지거나 극복하고 빠르게 성장하거나 둘 중 하나죠. 이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힘과 능력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를 절망으로 가득 채우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우리가 맞서 싸우는 세계의 모습을 잘 알아둬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꿈꿔야 합니다. 바로 지금 모든 경고음이 동시에 꺼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도약할 때입니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Applause)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