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December 12, 1904, Chief Lontulu laid 110 twigs in front of a foreign commission. Every twig represented a person in his village who died because of King Leopold’s horrific regime in the Congo— all in the name of rubber. Chief Lontulu separated the twigs into four piles: tribal nobles, men, women, and children— then proceeded to name the dead of one-by-one. His testimony joined hundreds of others to help bring an end to one of the greatest atrocities in history.
1904년 12월 12일에 론툴루 추장은 외국 위원회 앞에 나뭇가지 110개를 놓았습니다. 각 나뭇가지들은 마을의 죽은 사람들을 상징했으며 콩고 제국의 잔혹한 레오폴드 왕 제도 때문에 모두 고무의 이름으로 죽은 겁니다. 론툴루 추장은 나뭇가지들을 4개의 더미로 나누었습니다: 부족의 귀족,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도 목소리와 합쳐져 역사의 끔찍한 한 장면은 막을 내렸습니다.
Beginning in the late 1800s, European countries participated in the so-called “Scramble for Africa.” They colonized 90% of the continent, exploiting African resources and enriching their countries. Belgium had recently become an independent kingdom. Its ruler, Leopold II, wanted to acquire what he called “a slice of this magnificent African cake.”
1800년도 후반부터 시작하여 많은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 분할“에 참여했습니다. 90%의 대륙을 식민지로 삼았고, 아프리카의 자원을 착취해 자기 나라를 풍족하게 만들었습니다. 최근에 벨기에는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리더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이 말하길 “아프리카라는 엄청난 케이크“의 한조각을 원했습니다.
Meanwhile, he read colonial explorer Henry Morton Stanley’s reports about traveling through Africa. Stanley emphasized the Congo basin’s majesty. So, in 1879, Leopold contracted him to return to the Congo. There, Stanley deceived leaders into signing some 450 treaties allowing for land use. Leopold persuaded the US and European powers to grant him ownership of the Congo, pledging to protect free trade in the region. And on May 29, 1885, a territory more than 80 times the size of Belgium and home to 20 million people was declared his own private colony— by no one it actually belonged to.
한편 식민지 탐험가인 헨리 모턴 스탠리의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보고서들을 읽었습니다. 스탠리는 콩고 유역의 근사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레오폴드는 그를 1879년에 다시 콩고로 보냈습니다. 거기서는 스탠리가 수많은 리더들을 속이며 땅을 쓰게 해주는 450조약을 맺었습니다. 레오폴드는 미국과 유럽 세력들에게 자유 무역을 약속하며 콩고의 소유권을 허락해주길 설득했습니다. 결국 1885년 5월 29일에 그는 벨기에의 80배가 넘는 크기에 2천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있는 땅을 사실은 누구의 것도 아닌 땅을 자신의 소유로 선언했습니다.
Leopold lost no time consolidating power in what he called the Congo Free State. He claimed land, raised an army, and forced many Congolese men to complete unpaid labor.
레오폴드는 재빨리 콩고 독립국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세력을 굳혔습니다. 땅을 차지하고, 군인들을 모으고 많은 콩고의 사람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Things got even worse when, in 1887, a Scottish inventor redeveloped the pneumatic tire, creating a massive international market for rubber. The Congo had one of the world’s largest supplies. Leopold seized the opportunity, requiring villages to meet ever-greater rubber quotas. Congolese men had to harvest the material from wild vines. As supplies drained, they walked for days to gather enough. Leopold’s army entered villages and held women and children hostage until the impossible quota was met. Soldiers sexually violated women and deprived children of food and water.
1887년에 상황은 악화됬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발명가가 공기압 타이어를 재개발하며 고무의 가치가 전세계적으로 급상승 했습니다. 콩고는 세계에서 가장 자원이 풍부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레오폴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을에 어마어마한 고무 할당량을 채우길 요구했으며 콩고 사람들에게 야생 덩굴에서 재료를 수확하게 만들었습니다. 재료들은 빨리 소진이되었고, 이를 다시 찾기 위해선 며칠을 걸어야했습니다. 레오폴드의 군대들은 마을들을 침입해 말도 안되는 할당량을 채을 때까지 여성들과 아이들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군인들은 여성들을 성폭행 했으며 아이들을 굶겼습니다.
Congolese people rebelled— they refused to cooperate, fought Leopold’s soldiers, hid in the forests, and destroyed rubber vines. Leopold’s army responded to resistance or failure to meet quotas with unflinching torture and executions. Because guns and ammunition were expensive, officers ordered soldiers to prove they used their bullets in the line of duty by removing a hand from anyone they killed. However, many soldiers hunted using their guns. To avoid harsh penalties and account for lost bullets, they cut off living people’s hands. They also used this practice as punishment. If rubber quotas weren’t met, soldiers would sever people’s hands and bring them to their commanders instead of rubber.
콩고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명령도 안따랐고, 레오폴드의 군인들과 싸웠으며, 숲속에 숨기도하고, 고무 덩굴들을 파괴했습니다. 레오폴드의 군대는 반란군과 할당량을 못채운 이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총과 탄약이 비쌌기 때문에 장교들은 군인들에게 탄환을 쓴 직무의 증거로 죽인 사람들의 손을 절단해 가져오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군인들은 사냥을 할 때 총을 썼기 때문에 무서운 형벌을 피하기위해 살아있는 사람들의 손을 절단해 왔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것을 처벌로 행했습니다. 고무 할당량을 못채우면 군인들은 사령관들에게 고무 대신 사람들의 손을 잘라왔습니다.
The regime dramatically upended daily life and agriculture, causing widespread starvation and disease. Meanwhile, King Leopold built monuments and private estates with the wealth he extracted.
이 정권은 일상과 농업을 뒤엎었고 때문에 기아와 질병이 빠르게 퍼졌습니다. 그동안 레오폴드 왕은 덕분에 만든 돈으로 기념물과 집들을 지었습니다.
Soon, people brought international attention to the horrific abuses of Leopold’s Congo Free State. In 1890, American journalist George Washington Williams accused King Leopold of “deceit, fraud, robberies, arson, murder, slave-raiding, and [a] general policy of cruelty.” In 1903, Diplomat Roger Casement wrote a report that corroborated the nature and scale of the atrocities. It was published the following year.
곧 콩고 독립국의 경악스러운 사태는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1890년에 미국의 언론인 조지 워싱턴 윌리엄스는 레오폴드 왕은 “속임수, 사기, 강도, 방화, 살해, 노예 매매와 전반적으로 잔인한 방침” 을 썼다며 비난했습니다. 1903년에는 외교관 로저 케이스먼트는 이 끔찍한 일의 규모와 극악무도함을 보고서로 썼고 그 다음해에 출판이 되었습니다.
In response, Leopold appointed his own commission to investigate the accusations. They heard numerous witness statements in the Congo— Chief Lontulu’s included. The report only confirmed the worst. Facing pressure, Leopold relinquished control of the Congo to the Belgian government in 1908.
이에 대응하여 레오폴드는 위원회를 만들어 비난에 대해 조사하게 했습니다. 론툴루 추장을 포함한 많은 콩고인들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보고서는 그저 최악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압박을 받아 레오폴드는 그제서야 콩고를 포기했습니다.
But this did not mean justice. The Belgian state awarded Leopold 50 million francs “in testimony for his great sacrifice in favor of the Congo.” He died the following year. Crowds booed his funeral procession. For more than 50 years following, the Congo remained a Belgian colony, until declaring independence in 1960. That year, the Congo elected its first prime minister, Patrice Lumumba. But months later, he was unseated in a US and Belgium backed coup. In early 1961, Lumumba was assassinated under Belgian supervision. The coup launched the country into a decades-long dictatorship.
하지만 이것이 정의를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콩고를 위한 굉장한 희생“ 때문이라고 벨기에는 레오폴드에게 5천만 프랑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해에 레오폴드는 죽음을 맞았고 민중들은 그의 장례식에서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이후 50년이 넘도록 콩고는 벨기에의 식민지로 남았고, 1960년에 드디어 독립을 하였습니다. 그 해에 패트리스 루뭄바는 콩고의 초대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몇달 후 미국과 벨기가 일으킨 쿠데타 때문에 그는 자리를 잃었고, 1961년 초에 루뭄바는 벨기에의 지휘 아래 살해당했습니다. 그 쿠데타는 나라를 몇십년의 독재 정권으로 빠트렸습니다.
Around 10 million Congolese people are thought to have died during Leopold’s occupation and looting of the Congo. Despite this devastation, calls for reparations have gone unanswered. To this day, throughout Belgium can be found the monuments King Leopold built on a foundation of inconceivable cruelty.
레오폴드의 정권 아래에서 대략 천만 명의 콩고인들이 죽었다고 추정됩니다. 이 참담함에도 불구하고, 배상에 대한 요구는 묵살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벨기에 곳곳에 레오폴드 왕이 지은 기념물들이 있습니다.